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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계발/독서노트

【재물의 신, 범려】부와 명예를 모두 누린 사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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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을 사기만 연구해오신 김영수 교수님!~

이 어렵고 장대한 이야기를 우리가 이해하기 쉽게 풀어서 기술한 내용이 너무 가슴에 와닿아서 직접 타이핑을 쳐서 여러분들에게 소개하기 위해서 올립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사기열전에서 범려에 대한 이야기를 좋아해서 특별히 선정했습니다.

https://www.miricanvas.com/v/111d175

범려는 세 번이나 다른 선택을 하고도

천하에 이름을 떨쳤다.

그는 떠나기만 한 것이 아니라

머문 곳에서도 예외 없이

이름을 떨쳤다.

권41 [월왕구천세가] 中

때를 알고 떠나는 자의 뒷모습은 아름답다는 말이 있다. 특히 물러나야 할 때를 아는 사람의 뒷모습은 더욱 그렇다. 범려의 진정한 결단과 선택은 정작 오, 월의 지루한 싸움이 끝나고 난 다음에 더 빛을 발했다. 오나라를 멸망시키고 판도를 뒤집은 월왕 구천은 계속해서 장강 유역까지 세력을 뻗치고 패자를 자칭하기에 이르렀다. 범려는 최대 공신으로 상장군에 임명되었으나 마음은 편치 않았다. 범려는 생각했다.

큰 명예를 짊어지고 오래 살기는 어렵다.

그리고 구천이란 사람과는 어려움은 함께할 수 있지만,

편안함은 함께할 수 없다.’

 

생각에 생각을 거듭한 끝에 범려는 구천에게 사직서를 내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중천에 떠 있는 태양과 같은 군주구천을 향해 사표를 내던지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조금만 삐끗했다간 반역으로 의심받을 가능성이 다분했기 때문이다. 범려가 고심 끝에 월왕 구천에게 올린 사직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월왕구천세가」).

 

“신은 이렇게 들었습니다. 군주에게 근심이 있으면 신하는 수고롭고, 군주가 욕을 보면 신하는 죽는다고 말입니다.

지난날 군왕께서 회계에서 치욕을 당하셨는데도 죽지 못한 것은 이 일 때문이었습니다. 이제 지난날의 치욕은 이미 씻었습니다. 하오니 이제 회계의 치욕에 따라 신의 목을 베어주십시오!”

 

마음을 흔드는 사직서의 표본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월왕 구천이 이를 받아들일 리 없었다. 구천에게는 지금 전개되고 있는 상황에 대해 판단을 내릴 만한 충분한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그대와 이 나리를 나누어 가질 것이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대를 죽이겠다.”

 

절강성 소흥에 쓸쓸하게 남아 있는 문종의 무덤에서 우리는 역사의 회한을 진하게 느끼게 된다. 문종은 선택의 기로에서 주춤거렸고, 그것이 그의 운명을 결정했다.

구천의 말은 매우 감동적이었다. 그러나 범려는 이 말 속에서 오히려 더 큰 불안의 싹을 감지했다. ‘나라를 어떻게 나누어 가진단 말인가? 그 옛날 합려도 부차도 오자서에게 같은 말을 하지 않았던가? 오자서가 어떻게 되었는가?’ 범려는 다음과 같은 말로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군주는 법을 집행하고 신하는 자신의 바람을 행동으로 옮길 뿐입니다."

 

그러고는 가벼운 보물을 챙겨 식구들과 함께 배를 타고 제나라로 들어 가버렸다. 이쯤 되자 구천도 하는 수 없이 회계산 일대를 범려의 봉읍으로 내려주는 선에서 이 문제를 일단 마무리 지었다. 한편으로는 나라의 절반을 거절하고 떠난 범려에 대해 마음이 놓이기도 했을 것이다. 춘추전국시대를 통틀어 범려처럼 평화롭게 은퇴한 인물은 정말로 찾 아보기 힘들다. 나아갈 때를 잘 아는 사람도 흔히 물러날 때를 놓쳐 낭패를 보는 경우가 허다하지 않은가? 그런 점에서 범려는 참으로 현명한 인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사람은 물러날 때를 알고 바로 물러나야 말년이 편한 법이다. 제나라에 도착한 범려는 문종에게 편지를 보내 이렇게 권했다. 생사고락을 같이해온 둘도 없는 친구이자 동업자였던 문종에 대한 범려의 마지막 배려였다.

날던 새가 다 잡히면 좋은 활은 숨겨두는 것이요,

교활한 토끼가 잡히고 나면 사냥개는 삶기는 것이외다.

월왕 구천은 목은 길고 입은 새처럼 뾰족하여 어려움은 함께할 수 있어도

즐거움은 같이할 수 없는 인물이오.

그런데도 그대는 어찌하여 떠나지 않고 있소?

 

떠날 떄를 알고 떠나는 자의 모습은 참으로 아름답다. 그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보통사람ㄷ르은 이를 실천에 옮긴 사람들을 동경하고 심지어는 존경까지 하는 것 아니겠는가? 동시에 그런 용기를 내지 못하는 우리들의 나약한 모습이 교차되기 때문에 씁쓸해하기도 한다. 범려는 물러날 때를 제대로 알아 실천에 옮긴 인물의 표본이라 할 만하다. 한창 잘 나가고 있을 때 물러나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므로 그의 결단은 두고두고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다. 그런데도사람들은 물러날 줄 모르 고, 또 물러나려 하지도 않는다.

범려의 편지에 문종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병을 핑계로 조정에 나가지 않았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 누군가 구천에게 문종이 반란을 꾀하고 있다는 모함을 했고, 기다리고 있던(?) 구천은 문종에게 검을 내려 자살을 강요했다. 문종은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였다. 아니.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문종은 아주 잠깐 머뭇거렸다. ‘설마 구천이?' 범려의 결단과 선택은 바로 문종의 짧은 머뭇거림 속에서 이루어졌다. 구천도 부차의 전철을 그대로 밝았다. 이것이 권력의 속성이요 대부분 권력자의 한계일 수밖에 없다. 범려도 문종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으나, 순간의 머뭇거림이 두 사 람의 최후를 완전 딴판으로 만들었다. 범려에게 섭섭한 것이 있다면 왜 문종을 함께 데리고 떠나지 않았느냐 하는 투정 섞인 원망뿐이다.

일설에는 범려가 오나라를 멸망시킨 다음 오왕 부차(합리라는 설도 있다 ) 의 애첩이었던 미녀 서시를 데리고 멀리 떠나 함께 살았다고 한다. 이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범려는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대한의 것을 다 누렸던 행운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것이 개인의 삶을 철저하게 희생했던 서시에 대한 보상으로는 결코 충분하지 않을 것이다. 강소성 무석시 여윈에 조성되어 있는 범려의 상과 두 사람이 행복하게 만년을 보내고 있는 모습의 그림이다.

 

하지만 선택은 결국 자신의 몫이다. 단지 빠르고 늦음, 단호함과 머뭇거림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범려의 행적은 후반부로 갈수록 더욱 화려하게 펼쳐진다. 제나라에 정착한 범려는 생산활동에 힘을 쏟아 큰 성공을 거두었다. 사기는 이 대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월왕구천세가」).

 

바닷가에서 아들과 함께 고생하며 온 힘을 쏟아 농사를 지었다.

오래지 않아 재산이 수십만 금에 이르렀다.

 

범려가 새로운 삶을 시작한 제나라 지역은 지금의 산동성이니, 아마도 그는 산동성 어느 바닷가에 정착했던 것 같다. 범려는 이 곳에서 성과 이름을 바꾸고 생활했지만, 생산에 큰 성공을 거두자 그 명성이 눈 깜짝할 사이에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이에 제나라 왕이 그를 재상으로 삼겠다며 초빙했다'. 범려는 오히려 한숨을 지으며 이렇게 탄식했다.

“집안에서는 천금의 재산을 이루었고 벼슬로는 재상에 이르렀으니 보통사람으로는 가장 높은 곳까지 간 셈이다.

하지만 이렇게 존귀한 이름 은 오래 갖고 있는 것은 아무래도 불길하구나!’

 

범려는 재상 자리를 사양하고 재산을 이웃 사람들에게 나누어준 다음, 특별히 값나갈 만한 재물만 지닌 채 몰래 제나라를 빠져나갔다. 범려는 도(지금의 산동성 정도현 서북)라는 지방에 정착했는데, 그 지역은 하남성과 가까워 예로부터 경제와 교통의 중심으로 이름난 상업도시였다. 범려는 이곳이 ‘천하의 중심으로 교역을 하면 각지와 통해 재산을 모을 수 있을 것 같다’면서, 스스로를 도주공이라 부르며 장사를 시작했다. 그가 장사하는 방법은 "아들과 함께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기르는 한편, 물건을 사서 쌓아두었다가 때를 기다려 되팔아 1할의 이윤을 남기는' 것이었다. 물가의 변동을 보아가며 물건을 사고팔아 이익을 남기는 방법이었다. 범려의 비상한 경제활동에 주목한 사마천은 경제를 전문적으로 다룬 화식열전에서도 범려를 비중 있게 다루면서 다음과 같은 평가를 남겼다.

 

시세의 변화에 따라 물건을 사고팔아 이윤을 남겼지 남에게 책임을 미루지 않았다.

 

요컨대 범려의 생산활동과 상업활동은 합리적인 시장경제의 원칙에 완전히 부합했다. 그에게 투기나 편법은 전혀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다. 범려는 평생 세 가지 다른 신분과 직업을 가졌는데 세 번 모두 성공하여 명성을 누렸다. 이에 대해 사마천은 “범려는 세 번이나 다른 선택을 하고도 천하에 이름을 떨쳤다. 그는 떠나기만 한 것이 아니라, 머문 곳에서 예외 없이 이름을 떨쳤다”라는 말로 간명하게 논평을 내렸다. 그가 물러날 때를 알아 제때에 물러났기에 얻은 평가이다. 쓸데없는 욕심을 버릴 때 운명의 신은 우리를 향해 흐뭇한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가벼운 걸음으로 다가온다. 문제는 늘 그렇듯 실천 여부에 달려 있다. 범려는 결단과 선택에서 누구보다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었다. 그렇다면 그가 이런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의식 기반은 무엇이며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 범려의 선택과 결단에 감탄하기에 앞서 우리는 그의 판단력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선택과 결단을 가능하게 하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가 판단이 아니겠는가? 사기 에서 범려가 처음으로 인용한 ‘토사구팽’의 함축적 의미는 결국 판단이란 문제로 귀착된다. 그렇다면 무엇을 판단해야 하는가? 현대적 용어로 말하자면 '오너의 본색을 파악하라’, 바로 이것이다. 특히 창업 이후에 나타날 징후들을 미리 짐작하여 자신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파악한 뒤 오너에게 위협이 될 수 있을지 없을지를 알아야 한다. 이럴 경우 또 다시 떠오르는 문제는 냉정하고 정확한 고급 ‘정보력'이다. 정보력은 결국 상황을 분석하고 인간의 본질을 간파하는 냉철한 지혜의 문제로 귀결될 것이다. 이렇듯 사마천의 사기는 인간의 책이자 인간의 지혜를 격발하는 더 없이 귀중한 고전임을 새삼 실감하게 된다.

 

사기의 소리

같은 시기를 살았던 장량과 한신처럼 범려와 문종 또한 선명한 대비를 이루는 최후를 맞이했다. 한신과 문종은 ‘설마, 유방이?' '설마, 구천이?’라는 생각으로 머뭇거렸고, 자신들이 앉아 있는 자리를 버리지 못해 망설였다. 그 짧은 머뭇거림과 망설임이 무거운 철퇴로 다가와 자신들의 머리를 내리칠 줄은 꿈에도 모른 채. 이들은 자신이 모시는 군주가 어떤 인물인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자신의 욕심을 제어하지 못한 채 오히려 욕심에 조종당하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이 실수가 장량과 한신, 범려와 문종의 생과 사를 갈랐던 것이다.

 

※ 출처:인간의 길을 묻다. 김영수지음/왕의서재 368P~37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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