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여대 명예교수님의 '나는 죽을 때까지 재미있게 살고 싶다'라는 책의 프롤로그의 내용인데, 각자가 나이 듦에 대한 생각과 느낌이 다르실 텐데 이 글을 읽고 나이 듦에 대해서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보세요^^

당신은 어떻게 나이 들고 싶은가
물의 깊이는 알 수 있으나 사람 속마음은 헤아리기가 어렵다는 말이 있다. 정신과 의사는 그 사람 속을 들여다보는 직업이다. 사람들은 50년 정신과 의사로 살아온 내가 사람 속을 훤히 꿰뚫어 보고 삶의 지혜를 통달한 줄 안다. 게다가 나이 들면서 적당한 주름과 은빛 머리칼까지 갖추니 원숙해 보이는 나의 풍모가 그런 오해를 더하는 듯하다. 인생을 잘 사는 비결 하나쯤 기대하고 질문을 던진 이들은 아마도 나의 대답이 싱겁기조차 할 것이다. 가령 어떤 이들은 “요즘 하루를 어떻게 여십니까?”라고 묻는데, 뻔한 하루를 특별하게 시작하는 방법을 알려 달라는 속셈이다. 나는 대답한다. “아침에 눈을 뜨면 텔레비전을 켭니다. 이불 속에서 좀 더 자 볼까 싶고 또 오늘 할 일에 대한 부담이 떠올라 눈을 뜨기 싫지만 뉴스를 들으며 차츰 잠에서 깨어납니다. 출근 준비를 하다 보면 어느새 무거웠던 마음은 ‘하루가 시작되었구나’ 하는 감사와 다행감으로 가벼워지지요.” 여든을 바라보는 나도 여전히 인생의 이런저런 불안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며, 그럼에도 습관적인 하루에 지치지 않으려 애쓴다는 것, 나로서는 솔직한 고백이다. 나이 듦에 대한 물음도 비슷하다. “나이 들면 뭐가 좋은가요?” 하고 묻지만 나는 “나이 들면 뭐가 좋겠습니까? 좋은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라고 답한다. 보통의 노후라면 평생 아이들 키우느라 모아놓은 돈도 많지 않고 건강도 예전만 못하다. 생물학적 노화와 사회적인 쇠퇴, 앞날에 대한 불안과 무기력함, 죽음에 대한 두려움까지, 좋을 게 뭐가 있겠느냐는 반문이다. 그러나 나의 답은 계속된다. “나이 든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좋은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오는 것이기 때문에 이 또한 받아들여야 할 생의 궤적입니다. 나이 들어 좋은 점이라기보다 나이 들면서 좋은 일, 즐거운 일을 만들어 가겠다는 마음가짐이 훨씬 중요하지요.” 정신과 전문의로 은퇴한 뒤 나에게 감투를 주려는 단체들이 몇 군데 있었지만 모두 거절했다. 나이 들어 좋은 점은 딱 하나, 더 이상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 없다는 점이다. 자존심을 세워주는 그럴듯한 자리라도 나는 명예보다는 즐거움, 책임보다는 재미를 택하면서 살기로 했다. 생각해 보면 젊은 날의 나는 무엇이든 재미를 택하려고 애썼다. 재미있는 일만 골라 한 것이 아니다 내가 해야 할 일을 재미있는 쪽으로 만들어 갔다. 서너 평 남짓한 진료실에서 하루 종일 환자들이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 쏟아내는 아프고 슬픈 이야기들을 듣다 보면 내 몸과 마음은 커다란 쇠공을 매단 듯 무겁고 어두워지곤 했다. 내가 그들을 완벽하게 낫게 해 줄 수 없다는 데서 오는 스트레스였다. 나는 생각을 바꿨다. 환자들이 조금이라도 나아지는 데 도움이 되는 일을 해 보자고, 그러자 좋은 생각들이 많이 떠올랐고, 곧바로 실천에 옮겼다. 정신과 폐쇄 병동을 개방 병동으로 바꾸고, 환자들이 속마음을 털어내는 사이코드라마를 시도하고, 정신이 아플 뿐 몸은 건강한 환자들을 위해 체력 단련실을 만들었다. 일을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 나는 신이 났고 즐거웠다. 한마디로 ‘재미있게 견디기’다. 그래서 나는 50여 년의 정신과 의사 생활에서 지치지 않을 수 있었다. 러셀은 말했다. “재미의 세계가 넓으면 넓을수록 행복의 기회가 많아지며, 운명의 지배를 덜 당하게 된다"라고. 그런 재미를 추구한 덕분에 노년이 된 지금, 나는 심심하지 않게 잘 살고 있다. 요즘 가장 재미있는 일을 꼽으라면 컴퓨터를 가지고 노는 것이다. 컴퓨터를 이용해 정신과에 관한 교육과 상담은 물론, 한 사이트에는 아동기 감정을 이해시키기 위한 자료로 나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매일 올린다. 보는 사람도 재미있다 하지만 정작 제일 재미있어하는 사람은 바로 나다. 또 컴퓨터로 젊은이들과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눈다. 그 외에도 집에서 한 시간 떨어진 북악스카이웨이 천천히 걸어서 다녀오기, 30년 동안 의료 봉사를 해 온 네팔 1년에 한 번 방문하기, 한 달에 한 번 시 낭송 모임, 40년 동안 봉사해 온 보육원에 들러 아이들과 놀아 주기, 주말마다 네 자녀 가족과 돌아가며 저녁 식사하기, 보고 싶은 사람 불쑥 방문하기 등, 지금도 재미있는 일들이 많다. 아마도 이 글을 읽는 사람은 나의 노년을 부러워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조금도 부러워하지 마시라. 누구든 재미있게 살겠다고 마음먹는다면 온통 재미있는 일이 벌어질 테니 말이다. 물론 젊은 시절 느끼던 재미와는 분명 다르다. 그러나 젊어서나 나이 들어서나 똑같은 재미를 느끼는 일은 정말 재미없지 않을까. 바로 지금 나이에, 내가 가진 것만으로도 즐거움을 느끼는 일이 진짜 재미다. 젊어서는 산 정상에 오르는 일이 재미있었다면 나이 들어서는 멀리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재미있을 수 있다. 젊어서의 재미만 생각한다면 노년은 불행하기만 하다. 바로 지금, 자신에게 맞는 재미를 찾는 것이 진정 ‘나이답게’ 늙어 가는 일이다. 요즘 방송 토론에서 노인의 급격한 증가로 우리 사회가 짊어질 재정적 부담에 대한 걱정을 자주 거론한다. 돈이 없는 노후는 곧 고통이자 절망이라는 분위기다. 경제적인 풍요가 꼭 아름다운 노년을 만들어 주지는 않음을 알면서도 우선 돈부터 해결하자고 한다. 물론 경제적 준비는 중요하다. 그러나 여기에 나이 듦의 가치와 의미에 대한 고민도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젊은 이부터 중장년층까지 ‘나는 어떻게 나이 들어갈 것인가’를 생각하며 나이 듦을 배우고 익혀야 한다. 이런 진지한 성찰을 통해 나이 드는 것이 두렵지만은 않다는 것을 깨닫고, 그럼으로써 현재를 더욱 충실하게 살기 위해서다. 우리는 평생 시험, 취업, 결혼 준비 등 많은 준비를 하지만 정작 나이 듦의 준비는 소홀하다. 나이 드는 것도 반드시 ‘선행 학습’이 필요하다. 아무리 준비해도 막상 닥치면 당황하고 실수하기 마련인데, 나이 든 후에 시작한다면 너무 늦다. 그동안 나는 정신과 의사로서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왔다. 정신 질환을 앓는 이들은 남의 말을 듣지 않는 공통점이 있다. 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끝없이 들어 주며 내가 말할 수 있는 기회를 기다렸다. 그들이 내 말을 듣기 시작하면 치료의 문은 조금씩 열리는 것이다. 늘 그렇게 다른 사람의 말을 들어온 내가 이제 나의 이야기를 들려주게 되었다. 특별할 것 없는 보통 할아버지가 살아온 이야기지만, 사람들에게 내어놓을 수 있는 이야기가 있으니 한편으로는 지난 내 삶에 대한 아쉬움을 조금 덜어 내는 기분이다. 나의 이야기가 인생 선행 학습의 작은 자료로 활용되어 ‘나는 어떤 모습으로 나이 들어갈 것인가’를 생각해 보는 작은 불씨가 된다면 아주 기쁠 것이다.
- 2013년 2월의 아침에 이근후
출처:나는 죽을 때까지 행복하게 살고 싶다. 저자 이근후(이화여자대학교 명예교수)/갤리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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