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벤 브링크만의 책 '철학이 필요한 순간'은 불안과 허무에서 벗어나 진짜 내 삶의 주인공으로 당당하게 살게 할 철학적 통찰
열심히 살고 있지만 어딘지 모르게 공허한 우리 삶을 단단하게 만들어줄 10가지 삶의 원칙을 담은 『철학이 필요한 순간』. 끊임없이 유동하는 불확실한 세상에서 우리가 흔들리지 않고 굳게 서 있을 만한 단단한 토대를 마련할 수 있도록 소크라테스, 니체, 데리다, 로이스트루프, 머독 등 고금의 철학자로부터 길어 올린 10가지 삶의 관점을 제시한다.
우리는 누구나 행복을 바라지만 막상 무엇이 행복이냐고 물으면 쉽게 대답하기 어렵다. 누구나 쉽게 쾌락을 좇을 수 있고 많은 이들이 자아실현과 자기계발에 매달리는 지금, 사람들은 정말 행복할까? 철학으로 삶의 의미를 되찾는 심리학자 스벤 브링크만은 이 질문에 단호하게 아니라고 말한다.
행복도 소비가 되는 시대인 오늘날의 우리는 물질적 풍요 속에서 얼마든지 쉽게 쾌락을 좇을 수 있지만, 이것이 욕망의 노예나 폐쇄적인 나르시시스트로 만들 뿐, 마음 한편에 자리 잡은 불안하고 허무한 감정을 결코 지워주지 못한다고 이야기하면서, 삶을 살아가는 방식이라는 철학의 본질에 집중해 실제 삶의 지표로 삼을 만한 관점들을 제시한다.
존엄성, 약속, 진실, 책임, 사랑, 용서, 자유, 죽음 등 언뜻 봐서는 실용적일 것 같지 않지만 쓸모없기에 더 쓸모가 있는, 우리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중요한 가치들을 소설과 영화, 일상 속 다양한 예시를 통해 살펴보면서 우리를 진정 행복하게 만드는 것들이 무엇인지 깨닫게 해준다. 이를 통해 모든 것이 급변하는 불확실한 시대에 우리가 믿고 의지할 만한 단단한 토대를 만들어나갈 수 있도록 도와준다.
출처:철학이 필요한 순간 : 철학이 필요한 순간 : 네이버 도서 (naver.com)
'자기란 관계 그 자체와 관계하는 관계다'
-쇠렌 키르케고르쇠렌 키르케고르Seren Kierkegaard는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덴마크 철학자입니다. 신학적이면서 철학적이고, 문학적이기도 한 그의 글은 풍성한 의미들이 복잡한 미로처럼 곳곳에 얽혀 있어서, 오늘날까지도 다양한 해석의 욕망을 자극합니다. 그의 삶과 사상을 다룬 훌륭한 책이 많지만, 여기에서는 그의 실존 사상을 집중적으로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의 대표작인 『죽음에 이르는 병』의 도입부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인간은 정신이다. 그런데 정신은 무엇인가? 정신은 자기다. 그러면 자기는 무엇인가? 자기란 관계 그 자체와 관계하는 관계다. 또는 그 관계 (자기를 구성하는) 안에서 자기 자신과 관계하는 것이다. 자기란 관계가 아니라 그 관계가 자기 자신과 관계한다는 (사실에 존재하는) 것이다.
굉장히 수수께끼처럼 들리겠지만 키르케고르가 하는 말은 사실 단순합니다. 우선 그는 인간을 정신이라고 정의하고 정신이 정확히 무엇인지 묻습니다. “정신은 자기”라는 그의 대답은 다시 ‘자기’를 정의하는 문제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자기란 관계 그 자체와 관계하는 관계”라고 결론짓습니다. 달리 말해, 자기는 관계 그 자체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그가 말하는 관계란 대체 무엇과 무엇 사이의 관계를 말하는 걸까요? 인용문에는 그에 대한 답이 없지만 키르케고르라면 인간은 육체를 가진 존재인 동시에 영혼을 가진 존재, 즉 육체와 영혼의 종합적 관계라고 말할 것입니다. 요즘 용어를 써서 설명하면 정신적인 존재이자 생물학적인 존재라고 표현할 수 있겠네요.
세상과 관계하는 방식
그러나 단순히 영혼과 육체의 관계로는 키르케고르가 말하는 ‘자기’를 설명하지 못합니다. 그가 말하는 관계란 정신이 자기 자신과 관계하는 행위 자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달리 말해 자기는 우리의 정신도 아니고 육체도 아니며 그것의 단순한 총합도 아닙니다. 이들 사이의 관계 그 자체에 관계하는 행위를 말하는 것이지요. 키르케고르의 자기 개념은 우리가 우리의 정신과 신체, 그리고 그것에 영향을 주는 세상과 관계할 뿐 아니라, 우리가 이 모든 것과 어떻게 관계를 맺을지에 대해서도 관계를 맺고 관여할 수 있다는 사실에서 나옵니다.
앞의 인용문에서 정신 대신 문화라는 단어를 대입하면 이해가 좀 더 쉬울 것 같네요. 바로 ‘인간은 문화적 존재’라고 말이지요. 문화는 자연(우리 몸을 포함해서)과 정신 사이의 관계로서 우리에게 영향을 줍니다. 문화라는 단어는 ‘경작’이나 ‘가꾸기’를 뜻하는 라틴어 ‘쿨투라cultura’에서 나왔는데요. 때때로 자연과 반대 자리에 놓이기도 하지만, 경작된 형태의 자연이라고 말하는 게 더 정확할 겁니다. 농사를 떠올리면 이해가 쉬울 겁니다. 우리 인간은 수천 년 동안 논밭을 경작했지요. 그것은 여전히 자연이지만 동시에 우리가 가공한 형태의 자연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어떤 문화적 생산물도, 이를테면 예술이나 언어, 사회적 관습 같은 것도 결코 비자연적인 것이 아닙니다. 자연이 가공되는 하나의 방식일 뿐이지요. 문화는 개인과 세상의 관계망으로 구성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자기가 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은 물론, 세상과도 관계를 맺는다는 것을 뜻합니다. 모든 동물은 먹고 자고 생식을 통해 유전자를 다음 세대에 전달하지만, 인간의 문화는 이 모든 것들이 이루어지는 ‘방식’ 자체를 중간에서 매개합니다. 그 결과 문화는 세계 곳곳에서 다양한 형태를 갖습니다. 언어, 음식 문화, 가족 구성, 일상생활의 리듬이 문화권마다 다르지요.
사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세상과 관계를 맺으며 존재합니다. 식물은 광합성을 위해 햇빛이 쬐는 방향으로 움직이면서 빛 에너지와 관계합니다. 소시지를 먹는 개는 자기 자신의 허기, 그리고 음식과 관계하고 있고요. 그러나 식물이나 개는 키르케고르가 말한 의미에서 자기를 갖지는 않습니다. 둘 다 자신이 세상과 관계하는 방식에 관여할 수는 없으니까요 다른 생물과 마찬가지로 인간 역시 세상과 관계합니다. 하지만 우리를 고유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우리 자신이 세상과 관계하는 방식에 관여할 능력이 있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선탠을 하고 싶을 때 식물처럼 태양을 따라 움직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햇빛 노출이 피부암 위험을 증가시킨다는 신문 기사를 읽은 뒤에는 완전히 반대로 햇빛을 피해 그늘에 숨을 수도 있지요. 햇볕을 쬐고 싶은 욕망이 아무리 강해도 그에 따르는 결과를 생각하고, 문화적으로 학습한 지식을 토대로 자기 욕망과 반성적으로 관계할 수 있는 거지요.
또한 우리는 소시지를 먹고 싶을 때 먹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만약 우리가 채식주의자라면, 과도한 육류 섭취에 따른 기후변화 문제를 염려한다면, 달리 말해 우리가 육식에 대해 문화적으로 학습한 어떤 생각을 갖고 있다면 고기를 먹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와 달리 개는 스스로 식단을 조절하지 못합니다. 고기를 먹지 않고 채식을 하기로 결심하는 개는 없지요. 주인이 식단을 조절하기로 마음먹는다면 모를까, 개는 자유의지로 무언가를 먹을지 말지 선택하지 못합니다.
왜 그럴까요? 개는 자신의 허기와 반성적으로 관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배가 고프면 음식을 찾아 나서지만, 허기가 이끄는 대로 행동할지 말지 결정할 능력은 없습니다. 물론 개마다 기질이라는 게 있고 어쩌면 소심하거나 대범한 성격 차도 있겠지만, 본질적으로 자기가 없으
므로 자기-관계도 없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개가 주인의 바람과 달리 소시지를 참지 못하고 모조리 먹어버렸다고 해서 도덕적 책임을 묻지 않습니다. 짜증이 나서 개를 혼내고 다시는 그러지 못하도록 훈련을 시킬 수는 있지만, 어떤 경우에도 개의 행동에 도덕적으로 분노할 수는 없습니다. 자기 행동에 책임이 없기 때문입니다.
도덕적으로 분노하거나 책임을 묻는 일은 오직 상대가 자신의 행동과 관계할 수 있을 때에만 가능합니다. 상대가 키르케고르가 말한 자기라는 개념을 갖고 있을 때, 칸트가 목적의 왕국이라 부른 것에 속할 때에만 말이지요. 따라서 이 자기라는 개념은 인간이 본성과 닿아 있습니다. 우리가 의미 있는 삶을 사는 토대가 될 수 있으며, 굳게 지킬 만한 가치가 있는 훌륭한 관점이 되는 것이지요.
타인이 우리를 만든다
키르케고르는 자기를 반성적인 과정으로 설명합니다. 여기서 자기가 고정된 대상이 아니라 과정이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있는’ 것이 아니라 ‘일어나는’ 것이지요. 이런 맥락에서 자기는 자기 자신과 관계합니다. 이 능력은 인간성을 구성하는 필수 요소입니다. 이런 능력이 없다면 우리는 다른 동물과 똑같이 육체적인 충동이나 욕구에 따라서만 움직이게 될 테지요.
동물은 배가 고프면 음식을 찾습니다. 식욕보다 더 강한 다른 충동, 이를테면 두려움 같은 걸 느끼지 않는 한 말입니다. 그러나 성숙한 사람은 충동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무조건 그에 따르지 않고, 자신의 충동과 반성적으로 관계한 뒤에야 그것을 따를지 말지를 결정합니다. 이처럼 깊이 생각하는 능력은 우리 스스로 창조해내는 게 아닙니다. 이런 의미에서 키르케고르는 자기는 자기 말고 다른 것에 의해 구성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는 이것을 신이라고 주장합니다.
발달심리학의 세속적인 관점에서 해석하면 이것을 자기를 구성하는 사회나 문화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자아발달 과정에서 고립된 상태가 아니라, 오직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서만 반성적 자아를 기릅니다. 갓 태어나 말도 못하는 작은 인간이 칸트가 말한 존엄을 지닌 개인이 되기 위해서는 부모, 형제자매, 친구 등 무수히 많은 타자의 눈을 통해 자신을 보아야만 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관계할 때 비로소 우리 자신과 관계하는 법을 배웁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다른 사람들에게 빚지고 있는 셈입니다.
이는 20세기 초반 미국의 사회심리학자 조지 허버트 미드George Herbert Mead와 그 무렵 소련에 있던 레프 비고츠키Lev wygotsky가 거의 동시에 제안한 심리학 개념이기도 합니다. 앞서 저는 심리학을 상당히 비판했지만, 이 개념은 과학적 방법으로 우리 삶을 깊이 있게 설명한
중요한 개념입니다. 미드와 비고츠키의 뒤를 이은 현대 발달심리학은 어떻게 우리가 타인의 관점을 서서히 내 것으로 받아들이는지를 연구했습니다. 또한 대인관계를 발달시키고 주변 사랑하는 이들과의 소동을 동해 자아를 형성하는 과정을 깊이 있게 분석했습니다
우리의 자아는 늘 다른 사람을 통해 발달합니다. 우리의 반성적 자기 관계, 키르케고르가 말하는 자기는 바로 이러한 사회적 관계의 결과입니다. 비고츠키는 이 점을 날카롭게 분석해냈습니다. 그는 아이의 타고난 생물학적 성향이 부모의 해석을 통해 의지의 반성적 행위로 발전
한다고 말합니다. 예를 들어 유아는 시야에 들어온 물체에 자동적으로 손을 뻗는 '움켜잡기 반사의 본능을 타고납니다. 이런 행동은 아이가 학습을 통해 익힌 게 아니라 본능적인 행동이지요. 하지만 아이는 손에 닿지 않는 물건을 잡으려 손을 뻗을 때, 어른이 나서서 그것을 대신 집어주는 경험도 하게 됩니다. 어른은 아이의 본능적인 움직임을 의도가 있는 것으로 해석했고 그 결과 아이는 자기 손가락으로 물건을 가리켜서 어른의 주의를 끌 수 있다는 것을 배우게 된 거지요. 처음에는 순전히 본능적인 반사작용(움켜잡기)으로 시작한 행동이 의도적인 행동(가리키기)으로 발전합니다. 이런 변화는 아이가 물건을 가리키는 동작을 의도를 가진 동작으로 해석할 때 일어납니다. 그렇게 해서 아이는 점점 자신의 행동에 의사를 담을 줄 알게 됩니다.
발달심리학은 이러한 현상이 '근접발달영역'(아동이 혼자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실제 발달 수준과 어른이나 또래의 안내와 도움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잠재적 발달 수준 사이의 영역 옮긴이)에서 일어난다고 말합니다. 어른은 아이를 도와, 처음에는 도움을 받아야만 할 수 있던 일들을 혼자 힘으로도 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우리는 오직 이런 방식을 동해서 자기를, 자기 자신과 관계하는 관계를 발달시킬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때 아이에게 너무 많은 책임감을 주면 오히려 일을 그르칠 수 있습니다. 아이가 천천히 능력과 책임감을 기를 수 있도록 도와야 하지요. 우리는 교육 과정에서 이러한 '아동중심 교육과정'이 너무 지나치지 않도록 세심하게 주의해야 합니다.
이와 반대로 어른이 '헬리콥터 부모'여서 아이의 모든 판단과 행동에 관여해 스스로 어떤 책임도 지지 않도록 할 때에도 문제가 생깁니다. 근접발달영역은 이 두 극단 사이의 균형에서 생기는데, 이를 위해서는 어른이 아이의 상황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바로 이런 조건이 갖취졌을 때 아이의 행동은 비로소 의미 있는 행위로 해석되고, 그것이 다시 아이가 적절한 능력을 습득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지난 강의에서 언급했던 버틀러의 주장과도 일치하지요. 아이는 스스로 감당할 만큼 적절한 정도까지 책임을 짐으로써 책임감올 발달시킬 수 있습니다.
자기계발서에서 말하는 자아는 틀렸다
얼핏 보기에는 키르케고르 같은 개신교 신학자와 마르크스주의 성향의 심리학자 비고츠키 사이에 큰 차이가 있는 듯 보입니다. 사실 저는 지금 그들의 사상에서 하나의 공통적인 핵심만 다루었습니다. 그러니까 자기는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 키르케고르에게는 신이고 비고츠키나 미드에게는 사회공동체에 의해 형성되는 반성적 과정이라는 점 말이지요.
그런데 이 지점에서 여러분은 제가 왜 자기라는 개념을 삶의 중요한 관점이라고 하는지 궁금해할 것 같습니다. 이 강의를 시작할 때는 분명히 자아를 신처럼 숭배하는 흐름을 비판해놓고는 말이지요
사실 저는 지금도 그 비판적 입장을 여전히 고수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비판하는 자아는 이번 강의에서 다룬 자기라는 개념과는 다르기 때문입니다. 키르케고르의 자기 개념은 자기계발서에서 묘사하는 자아와는 성격이 완전히 다릅니다. 우리 내면 어딘가에 있으면서,
자아실현을 동해 해방시켜야 할 진짜 나 같은 개념이 아니지요. 자기계발 논리에 따르면 우리는 그냥 그걸 찾아서 실현하면 됩니다. 그러나 발달심리학적으로 해석한 키르케고르의 자기 개념은 실현보다는 형성, 측 앙육이나 교육 과정과 긴밀하게 연결됩니다. 자아는 우리 내면에서부터 실현되는 게 아니라 자기 바깥에 있는 다른 존재와의 관계를 통해서 형성되기 때문이지요. 공동체 안에서 소통하는 법을 배우고, 살아가면서 경험하게 되는 모든 상호작용 과정을 통해서 형성되는 것입니다.
앞에서 살펴본 대로 우리는 항상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 예컨대 다른 사람의 표정이나 반응을 통할 때 스스로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세상으로부터 고립된 채 자기 성찰만 해서는 결코 자기 자신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오직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온전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자기는 바로 이런 능력을 부르는 개념이지요. 키르케고르는 종종 개인주의 사상가로도 불리지만, 이는 부분적으로만 맞는 말입니다. 그의 철학에서 가장 기본적인 개념인 자기가 형성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개인 바깥에 있는 행위자를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보다 최근의 연구들은 키르케고르를 사회심리학적 성향을 지닌 사상가로 설명하지요. 키르케고르가 말한 자기와 자기 관계는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과정을 통해 구성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른 동물과 달리 항상 다른 존재를 인식하면서, 자신의 충동을 따를지 말지 반성적으로 결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철학자 찰스 테일러Charles Taylor도 이 점에 주목했습니다. 테일러 또한 인간이 동물과 다르게 욕망뿐 아니라 도덕적 가치를 고려하면서 행동을 결정할 능력이 있다고 말합니다. 키르케고르의 주장과 무척 비슷하지요. 우리가 길을 지나다가 자연재해를 겪은 피해자를 돕자는 호소를 들었다고 가정해봅시다. 우리는 순간 이 호소를 무시하고 싶은 마음이 들 수도 있지만, 동시에 그런 반응이 그들을 도우려는 소망보다는 도덕적으로 가치가 떨어진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반성적 자아를 통해 충동을 누르고, 다른 욕망을 추구할 수도 있지요. 테일러는 이를 2차적 욕망', 곧 어떤 특정한 육망을 가지려는 욕망이라 부릅니다.
또한 테일러는 우리 앞에 놓인 선택지가 도덕적인지 아닌지 평가하는 능력을 강한 가치 평가'라 부릅니다. 반대로 '약한 가치 평가'는 우리가 지금 당장 가장 원하는 것만 생각하는 것이지요. 사람을 도덕적인 존재라고 정의할 수 있는 이유는 이처럼 우리가 충동적인 욕망뿐만 아니라 사회적이고 도덕적인 관점을 통해, 그러니까 강한 가치 평가를 통해 욕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달리, 오늘날 우리가 흔히 들을 수 있는 자아 개념은 이미 도구화가 됐습니다. 다양한 형태의 자기계발로 최적화되어야 할 상품이 되었지요. 심지어 연애나 우정 같은 인간관계에서도 효울성을 따지게 될 정도로 말입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과 관계하는 일이 의미가 있고 그 자체로 목적으로 삼을 만해서가 아니라, 오직 행복과 성공을 성취하기 위한 유용한 도구가 될 때에만 그것을 활용합니다. 이러한 사회적 흐름 속에서 자아는 더 나은 성과를 좆는 개인의 또 다른 도구가 됐습니다. 내가 나 자신을 도구로 만들어버린 것이지요. 지금도 경영학과 자기계발의 권위자라는 사람들은 줄줄이 여러분 앞으로 와서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의 가장 중요한 경영 도구는 당신 자신입니다!
이러한 현상을 막기 위해, 이 강의에서 강조하는 10가지 관점은 그 자체로 도덕적인 가치들로 구성되었습니다. 바로 약속, 책임, 진실, 사랑, 용서 같은 것들이지요. 사람은 이러한 가치를 통해 보다 건강하게 자기 자신과 관계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의 도구주의적이고 주관주의적인 흐름과는 달리, 저는 이런 가치가 여전히 존재하며 의미 있다고 생각합니다.
반성적 관계로서의 자기 개념이 공동체에 의해 형성된다는 깨달음은 중요합니다. 여기에 자기 관계의 도덕적인 중요성을 강조한 테일러의 의견까지 결합하면, 우리는 자아의 도구화를 막을 수 있는 강력한 방패를 얻을 수 있습니다. 키르케고르가 말한 의미에서 자기는 물건이
아니며, 결코 도구나 상품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누군가가 최적화하거나 현금화해야 할 자원도 아닙니다.
우리는 그것에 가격을 매겨서는 안 됩니다. 자기는 오직 존엄성을 갖지, 가격을 갖지 않습니다. 자기를, 그러니까 우리를 구성하는 관계의 중요성을 잊지 않는 것은 삶을 보다 의미 있게 만드는, 본질적인 가치를 지닌 일입니다. 이러한 반성적 자기 관계가 없다면, 우리에게는 어떠한 책임도 의무도 도덕성도 남아 있지 않을 테니까요.
※출처:철학이 필요한 순간/스벤브링크만/번역 강경이/다산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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